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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행 - 이 진명 본문

LITERATURE

여행 - 이 진명

집시. 2025. 4. 1. 00:00

 
 
 여행/ 이진명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틀린 말을 하는가
  보라. 여행은 안 돌아오는 것이다
  첫여자도 첫키스도 첫슬픔도 모두 돌아오지 않는다
  그것들은 안 돌아오는 여행을 간 것이다

  얼마나 눈부신가
  안 돌아오는 것들
  다시는 안 돌아오는 한번 똑딱 한 그날의 부엉이 눈 속의 시계점처럼
  돌아오지 않는 것도 또한 좋은 일이다

  그때는 몰랐다
  안 돌아오는 첫밤, 첫서리 뿌린 날의 새벽 새떼
  그래서 슬픔과 분노의 흔들림이 뭉친 군단이 유리창을 터뜨리고
  벗은 산등성을 휘돌며 눈발을 흩뿌리던 그것이
  흔들리는 자의 빛줄기인 줄은

  없었다. 그 이후론
  책상도 의자도 걸어논 외투도
  계단도 계단 구석에 세워둔 우산도
  저녁 불빛을 단 차창도 여행을 가서 안 돌아오고
  없었다. 없었다.
  흔들림이  흔들리지 못하던 많은 날짜들을 스쳐서
  그 날짜들의 어두운 경험과
  홀로 여닫기던 말의 문마다 못을 치고 이제
  여행을 떠나려 한다
  흔들리지 못하던 나날들의 가슴에 금을 그으면
  놀라워라. 그래도 한 곳이 찢어지며
  시계점처럼 탱 탱 탱 피가 흐른다
 
  보고 싶을 만큼, 부르고 싶은 만큼
  걷고 걷고 또 걷고 싶은 만큼
  흔들림의 큰 소리 넓은 땅
  그곳으로 여행 가려는 나는
  때로 가슴이 모자라 충돌의 어지러움과
  대가지 못한 시간에 시달릴지라도
  멍텅구리 빈 소리의 시계추로는 돌아오지 않을 것이다
  누가 여행을 돌아오는 것이라
  자꾸 틀린 말을 하더라도
  .
  . 

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_

 

 

이진명은 1955년 서울에서 태어난 대한민국의 시인입니다. 그는 서울예술전문대 문예창작과를 졸업했으며, 1990년 계간지 《작가세계》에 시 ‘저녁을 위하여’ 등을 발표하며 등단했습니다.
약력
• 등단: 1990년 계간지 《작가세계》 제1회 신인으로 등단.
• 수상: 제4회 일연문학상, 제2회 서정시학작품상 수상.
• 창작기금: 1994년 대산재단 창작기금 수혜자.
주요 저서
• 《밤에 용서라는 말을 들었다》 (민음사, 1992)
• 《집에 돌아갈 날짜를 세어보다》 (문학과지성사, 1994)
• 《단 한 사람》 (열림원, 2004)
• 《세워진 사람》 (창비, 2008).
이진명 시인의 작품은 쓸쓸함과 무관심, 그리고 존재의 허무함을 탐구하는 특징이 있습니다. 그의 시는 세상을 소외된 것들에 대한 깊은 성찰을 담고 있으며, 사랑과 빛의 떨림에 대한 질문을 던집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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